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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1-18 22:51
(한국일보) 빛나는 손끝 - 한국의 장인들 [8] 악기장 고흥곤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5,220  


"오동나무 5년이상 삭혀야 소리맛 나죠"

장인들의 손은 대부분 투박하다. 헌데 악기장 고흥곤(53)씨의 손은 곱다. 손가락은 길고 손톱하나 흠난 데가 없다. 그는 “살성이
좋아서 그래요”라면서 군살이 박힌 손아래쪽을 펴보인다. 일년에 그가 만드는 악기 수는 20대 남짓. 최고급 재료가 나오는 만큼 만들
뿐이다.

그가 만드는 악기는 거문고 가야금 아쟁 양금 등 온갖 종류의 현악기들이다. 악기를 만들지 않는 긴긴 시간에 그는 무얼 할까.
서울 종로구 숭인1동에 있는 고흥곤국악기연구원으로 찾아오는 국악기를 고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 않으면 국악연주회에
가있다. 그는 “연주를 많이 들어야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원으로는 그가 만들지 않은 악기도 숱하게 찾아오지만 어느 것이나 고쳐준다. 중학생이 찾아와 거문고 술대를 갈아달라고
하면 그는 사포를 들어 갈아주고 괘의 홈에 초칠도 해준다. “초칠을 잘 해줘야 농현이 잘 돼”라고 다정하게 일러주면서. 악기장이
이렇게 하찮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긴 아깝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지요”하고는 그만이다.



그는 전주 사람이다. 그는 악기 제조 분야의 첫번째 인간문화재 김광주(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장 1906~1984)의 수제자로 국악기와 인연을 맺었다. 김광주 역시 전주 사람으로 두 사람의 집은 전주시 완산구 태평동에 바로 이웃해 있었다.

고씨는 어린 시절 김광주의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가끔은 나무를 훔쳐다가 썰매를 만들기도 했다. “그 때는 이렇게 비싼 재료인지 몰랐지요.” 아들이 없던 김광주는 이런 개구장이 고씨를 퍽이나 귀하게 여겼던 듯 싶다.

그가 전주 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딱히 이렇다할 일자리가 없이 삼촌을 따라 건설일을 배운다는 것을 듣고는 서울로 이사해있던 스승은 ‘노가다판에 돌아다니느니 이거 하면 잘할텐데’ 하면서 올라오라는 소리를 부모님편에 전하더란다. 그래서 고교 졸업 1년만인 70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김광주의 공방으로 오게 됐다.

가야금이 두 세대 만들어지면 걸머지고 10시간씩 걸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갖다주던 스승은 솜씨가 알려지면서 69년 국립국악원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이사를 했다. 이 때 스승의 조카가 둘 스승과 함께 옮겨왔는데 고씨는 두사람과 함께 일을 배웠다. 비록 혈육간과 함께 있었지만 스승은 고씨를 차별하지는 않았던성싶다. 오히려 일솜씨가 좋다며 군대 가 있을 때에도 일을 도우러 오라고 연락을 해서 그는 휴가 때면 어김없이 스승의 공방을 찾곤 했다. 그가 군대 간 사이 김광주는 삼청동 공방을 폐쇄하고 서울 성북구 종암동 조카들 공방으로 가서 1년간 제작을 지도했지만 그가 제대하자 다시 제자의 공방을 찾아 84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가르쳤을 정도였다.

그가 처음 배운 것은 가야금을 만들기 위한 오동나무판의 대패질이다. 지금은 기계가 큰 일은 해주지만 당시만 해도 절단한 나무를 알맞은 두께가 될 때까지 일일이 손으로 대패질을 하고 톱질을 해야 했다. 대패질이 익숙해지면서 톱질, 끌질, 안족 만들기, 현꼬기를 두루 배웠다.

200가지 手공정 하나만 틀려도 소리달라져

악기장의 일은 대패질 톱질은 물론 실을 찌고 꼬는 일까지 모두 해야 한다. 톱이나 끌이 모두 날카로워 다치기도 부지기수다. 그도 일한 지 2년만에 오동나무를 힘주어 자르다가 끌이 밖으로 나가면서 복숭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일은 힘들었지만 실과 나무를 엮은 것이 마침내는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야금을 만드는 것은 나무를 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200가지 공정 가운데 하나만 틀어져도 소리가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울림통을 하는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 30~50년생의 참오동나무를 산지에서 구입한 후 울림통의 크기에 맡게 자른다. “갈수록 오래된 오동나무가 귀해져서” 그 전국의 목재상에게 ‘값은 제일 많이 쳐줄 테니 좋은 오동나무가 있으면 연락해달라’는 통문을 띄운 상태이다.

나무를 구하면 짜귀와 대패로 대강의 윤곽을 잡은 후 바깥에 내놓아 澍?눈을 맞히면서 5년 이상을 건조시킨다. 그는 이것을 ‘삭힌다’고 말한다. “된장도 푹 삭아야 맛이 나듯이 오동나무도 이 삭히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악기의 재료가 된다.” 약한 나무는 썩어 없어지고 너무 강한 나무는 뒤틀?竪?한다. 절반 정도만이 깨끗하게 살아남는다.

얼마나 잘 삭았느냐는 나무의 질감이나 색깔, 두드렸을 때 맑은 소리 등으로 판단하는데 그야말로 장인의 초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단계이다. 나무를 켤 때도 모양을 보고 남북 방향으로 켜느냐 동서방향으로 켜느냐가 달라지는데 이때도 감으로 결정한다. “논리적으로 설명은 안되지만 음향학 박사를 동원해 만들어도 전통기법으로 만든 악기의 소리를 따라가지 못하니 전통 방식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삭힌 나무를 짜귀와 끌 대패 조각도를 활용해서 울림통을 만든다. 이어 인두로 울림통을 지지고 대추나무나 장미목으로 현침을, 돌배나무로 양이두를 만들어 붙이고 잣이나 동백기름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어 울림통에 현을 매고 안족을 끼운다.

명주실로 만드는 현도 공정이 까다로운 분야 가운데 하나. 그는 국산 명주실을 사서는 일일이 손으로 꼬고 소나무 방망이에 감아 30분 정도 쪄서 현을 만든다. 소나무 방망이에 감는 것은 소나무진이 자연스레 실에 배어들면서 실의 장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정악가야금 '법금' 재현 보람느껴

그를 오늘날로 이끈 것은 법금이다. 법금은 풍류가야금, 정악가야금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영산회상이나 아악과 같은 전통음악에 쓰이는 가야금이다. 19세기말 산조가야금이 유행하면서 그 존재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물론 국립국악원에서는 쓰고 있었지만 소리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국립국악원은 1975년에 악기장인 김광주에게 법금을 제대로 재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무렵 김광주는 이미 연로하여 제자들이 법금을 완성했으나 소리가 신통치 않았다고 고씨는 기억한다. 그는 이때 법금을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법금이 산조가야금과 가장 큰 차이는 나무가 통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현은 굵고 소리가 더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난다.

고씨는 문헌을 뒤지고 김죽파와 장사훈, 황병기씨 같은 가야금 장인들이 소장한 오래된 법금을 찾아보기도 했다. 문헌을 뒤지다가 일본 정창원에서 신라 법금의 치수를 그대로 소개하는 책자를 펴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료를 찾아 일본도 다녀왔다. 그 결과 통나무로 만드는만큼 삭히는 기간이 충분해야 한다는 사실, 통나무를 완전히 파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등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그의 법금은 85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90년에는 전수조교(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고 97년에 악기장이 되었다.

"많이 들어야 잘 만들어" 시간나면 연주회에

국악기 제작 분야에서 그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다.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씨는 “가야금 연주자들은 다 그의 악기를 쓴다”며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국악연주회가 있으면 다 들으러 다니고 전문연주가가 요구하는 데 따라 악기를 맞춰준다는 것이다.

정작 고씨는 “5, 6년 했을 때는 뭐든지 만들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는데 10년을 넘어서니 더 어려워지더라”며 “지금도 매일 더 잘 만들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